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명제는 달리 생각하면 참으로 잔혹한 말이었다. 그 말에 따르면 당시 그리스 아테네에서 정치 참여가 불가능했던 여자, 어린이, 노예 그리고 외국인은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한정된 그리스 정체(政體)의 자유와 평등이 오늘날과 같은 법과 제도로, 달리 말해 보편적 정치참여가 가능한 시대로 전환되기 까지는 무려 2천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이와 같이 더딘 민주화 즉 보편적 기회의 부여가 이뤄지고 있는 것은 창조성의 영역도 마찬가지다. 창조성의 영역은 그 동안 소수에 의해 독점되어 왔다. 이들 소수는 ‘프로’라 불린다. 그들은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권위에 의해서 인정받는다. 그러나 그러한 인정을, 자격증을 갖지 못하는 대다수 아마추어는, 그리고 그들 아마추어에 의한 창조행위는 무가치성과 동일어였다. 그 가치를 평가하고 추종하고 지지할 세력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웹2.0과 같은 사회현상, 즉 사람들이 전통 조직 없이도 새로운 웹 도구들을 활용해 시·공간을 초월한 협업을 이루어 내는 것은 그들 아마추어에 의한 반란, 창조성의 민주화다. 이들은 말한다. 권위가 인정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가치를 증진시킨다면, 나의 이 보잘것 없는 작품도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러한 상호 가치증진에 대한 자부심은 아무런 경제유인 없이도 그들이 참여할 인센티브를 제공해주며 선순환 구조를 이뤄 하나의 활발한 이용자 커뮤니티를 만들어냈다. 리눅스 OS,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와 같은 위업은 그 작은 창조자들의 시공간을 초월한 협업의 성과물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창조성의 민주화가 웹에서 활성화된 계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창조성이라는 인간의 잠재적 본능이 웹이라는 개방적 플랫폼과 만났기 때문이다.
사람은 창조한다. 그것은 본능이다.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가 인간을 다른 생물체와 구별하는 가장 큰 특징을 언어사용, 그 창조성으로 지목했다.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유대인 수용소인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에서 발견한 극한 조건에서의 인간 심리 상태에 대해서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는 존재’라 정의하고, 그 첫 번째 특징으로 창조성을 꼽았다. 사람은 창조한다.
그러나 현재 오프라인 질서는 초·중·고 입시교육 체제를 봐도, 획일적인 대학문화를 봐도, 그리고 권위와 규율이 아직도 지배적인 기업의 조직문화를 보아도 창조성이 만발할 수 있는 개방적 플랫폼과는 거리가 멀다. 창조성이 발현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쉽고 빠르게 실험될 수 있는, 그 도전과 실험의 실패 비용이 적은 플랫폼이 필요하다. 오프라인이 채우지 못하는 그 이상조건을 만족시키는 곳이 본래 개방과 공유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인터넷이다.
그러나 이토록 개인이 ‘자유롭게’ 창조의 정신을 꽃피우기에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빈곤한’ 자유를 가지고 있다.
첫째, 창조에 활용할 수 있는 기존 지식 자체가 충분히 주어져 있지 않다.
영어에 비해서 한국어 자료로 검색할 수 있는 정보와 지식은 아직 너무 적다. 특별히 단편적 지식이 아닌 양질의 정보가 부족하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각종 양질의 정보와 지식을 쥐고 있는 정부·대학·연구기관 등이 쥐고 있다.
청와대에서 아래에서 상술할 공유가능 저작권(Creative Commons Licence)을 일부 도입하고, 몇몇 대학들이 MIT에서 시작한 공개강의운동(Open Course Ware)에 참여하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지만 아직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많은 지식이 공유 가능한 형태로 웹에 공개되어야 한다. 이건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다. MIT는 당장의 금전적 이익은 포기했지만 대신에 그 돈으로 결코 살 수 없는 명성과 비전을 OCW 프로젝트로 얻었다. 그리고 그 명성과 비전이 구축하는 신뢰란, 사실상 정부·대학·연구기관에 있어서는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둘째, 뭔가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려면 기존 지식의 재활용이 필요하다.
지식이 지식을 낳는다. 그런데 만약 자기가 그 바탕으로 쓰고자 하는 지식이 타인의 것이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저작권 등 각종 법적 문제가 걸려 있다. 이 문제를 방임적 자유나 무조건적 통제가 아닌, 양 극단 사이의 대안적 방안으로 해결해보자는 게 하버드에서 지금은 스탠포드 로스쿨로 옮겨간 로렌스 레식이 제안한 공유가능 저작권(Creative Commons Licence)다.
나아가 이러한 공유를 통한 창조, 창조를 통한 공유를 위한 문화를 웹을 통해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전면적인 법적·제도적 검토가 필요하다. 미국은 하버드 로스쿨의 ‘인터넷과 사회를 위한 버크만센터‘(Berkman Center for Internet and Society)를 위시한 많은 국영·민간기관들이 웹2.0시대를 맞아 기존 거버넌스 모델을 개선하기 위한 많은 연구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도 일부에서 그와 같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문제의 중대성을 생각할 때 더 많은 참여와 투자가 요구된다.
셋째, 창조 문화 자체의 정착이다. 제도와 여건이 주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이용자 자체의 참여가 부재하면 커뮤니티는 생명줄이 끊기고 만다.
이용자가 지탱해주지 않으면 해당 커뮤니티는 명분, 수익성, 지속가능성을 모두 상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용자의, 이용자에 의한, 이용자를 위한 커뮤니티가 요즘 유행하는 웹2.0 커뮤니티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 수용이 아닌 지속적 창조에 대한 이용자의 관심과 참여가 핵심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문화를 꽃피울까. 먼저 할 일은 창조의 주체인 아마추어에 대한 오해를 풀고 그들의 가치를 재인정해 주는 것이다. 아마추어라는 건 그들이 전문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아마추어인 것만은 아니다. 물론 참여자 다수가 전문성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중 소수는 기존 프로 못지않은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을 아마추어로 통일시키는 건 그들의 자질이 아니라 동기다. 아마추어라는 말 자체가 원어로 ‘for love’(사랑을 위해서)를 뜻한다. 그들은 돈이 아니라 명성, 이상 혹은 그냥 재미있어서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마추어라 할 지라도 꼭 자질이 떨어지는 건 아니므로 그들의 작품이 질이 떨어진다는 법은 없다. 동시에 그 질이라고 하는 것도 우리가 함부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보기엔 쓸모없어 보이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다. 아마추어 세계에서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렇게 작고 모자란 도움이라도 상호 부조, 상호 가치 증진의 활동을 통해서 확대될 수가 있다면, 하나의 거대한 커뮤니티를 그리고 그 커뮤니티 내 협업의 상호작용의 반복을 통해 집단지성의 힘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와 엘리트에 의해 독점되던 창조성을 개방하고 공유하겠다는 것은, 창조성의 민주화는 아마추어를 포함해 기존 창조성의 힘을 약화시키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자원의 활용, 아이디어,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더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최근 유행하는 통섭 등의 학문 트렌드를 생각하면 본래 그것들은 철학과 같은 한 뿌리의 학문이었다. 그러다가 근대에 들어서면서 노동의 분업처럼 전문화된 개별 학문을 이루었다가 성장 정체를 이루자 다시 모이고 있는 것이다. 즉, 나뉘었다 한계에 부딪혔으니 다시 합치는 유행의 반복을 밟고 있는 것이다.
사회의 성장과 복지를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도 그와 같은 통섭에, 예상치 못한 곳에 숨겨져 있지 않을까. 그렇게 본다면 기존 프로와 엘리트에 아마추어를 포괄하여 새로운 창조성의 개념을 꿈꾸는 창조성의 민주화, 그리고 그 기반을 만들기 위한 제도·여건·문화를 위한 투자는 미래를 위한 투자다. 창조성의 민주화를 통해 구축된 웹상의 지식의 양적·질적 팽창과 그에 연관된 활동의 진화는 다시 전통조직인 정부, 기업, 그리고 시민사회에 새로운 지식기반과 유통채널을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픈 = 창조성의 민주화’로 가는 길은 웹이 주도적 생활환경으로 등장하는 21세기의 대세인 동시에 IT강국으로서의 강점과 창의력 부족의 약점을 겸비한 우리로서는 강점은 살리고 약점은 덜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치느냐 잡느냐는 누구 하나 탓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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