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디자이너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몰입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일반인들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긴 하루를 일하며 보내는 것도 그들에겐 자연스러운 생활이 된다. 그러면서도 TV에서 나오는 디자이너 캐릭터처럼 그렇게 폼나게 살아야 한다는 환상도 이제는 가지고 있지 않은 듯하다. 학교에서의 과제물이나 프로젝트도 이렇게 일반화된 디자이너의 헌신을 요구하며 진행되고 있으니 정말 긴긴밤들을 벗 삼아 우리는 참 자연스럽게 잘도 지내오고 있는 것 같다.
요즈음 필자가 강의하고 있는 대학원 학생들을 통해 파악된 내용은 이렇다. 학생 때는 학교 과제 수행과 배움을 위하여 눈 비비며 살다가 대학 졸업 후엔 원하던 직장에서 기대와 설렘으로 디자이너로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이젠 돈을 벌면서 할 수 있는 엄연한 프로가 되었다는 생각을 채 즐기기도 전에 엄청난 속도와 밀도의 작업을 요구받는 현실에 또 정신없이 온몸을 던져 학교에서 훈련받은 대로 정말 열심을 다해 한 4~5년 일을 한다. 그 과정에서 ‘이건 아닌 데, 아닌 데.’라고 느끼며 하나둘씩 지쳐가는 자신을 또는 동료들을 흔히 목격한다. 그래서 다른 직장을 기웃거리거나 대학원 또는 유학의 길을 찾게 되는 것이다. 지금 학업에 한창인 디자이너 지망생들에게는 웬 찬물이냐고 하겠지만 우리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지금쯤 '원초적인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디자인의 주제에 관한 것이다.
디자인의 주제는 무엇인가?
디자인의 주제(subject)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필자는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급변하고 있는 사회, 경제, 문화, 정치 등 모든 분야에 있어 디자이너의 역할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고 준비하며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을 돌파하는 기회로 삼기 위한 계기를 마련해 보고자 한다.
디자이너들은 학교에서 제공하는 여러 가지 기본적인 지식과 기술들을 배우고 습득한다. 예를 들면 드로잉, 타이포그래피, 컬러, 패턴, 트렌드, 레이아웃, 콘트라스트(CONTRAST), 쉐이프(SHAPE), 폼(FORM), 패키징 디자인, 로고 디자인, 에디토리얼, 포토그래피, 웹디자인 그리고 얼마간의 컴퓨터 활용 훈련 등일 것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경쟁적으로 좀 더 잘하기 위해 밤잠을 포기하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의 생활이 되고 전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명심하고 잊지 않아야 할 명제는 그것이 우리의 주제(SUBJECT)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을 또는 남의 생각을 우리의 손으로 표현하는 기술 즉, 표현능력(ART OF EXPRESSION)이다. 이러한 표현기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능력을 숙달된 손목에 국한하는 것은 우리의 영향력을 스스로 위축시키고 디자이너의 사회적 역할을 과소평가 또는 축소함으로써 디자이너들 스스로 시키는 대로만 반응하고 말 잘 듣는 바보로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잘 숙달된 손목만을 빌려 주는 일들만 열심히 밤새워서 하고 있다면 우리는 처음의 열정을 유지하며 고객과 클라이언트를 리드하는 디자이너로서의 보람을 느끼며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의 위상과 전문성을 갈고닦을 수 있을지 반문해 볼 일이다.
디자인의 역할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폭넓게, 복합적인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새롭게 도전받고 있다. 우리는 디자인의 새로운 역할을 인식하고 창조하고 확장하기 위해서 이에 부응하는 디자이너의 덕목을 제대로 인식하고 준비해 나가야만 한다.
그렇다면, 디자이너가 갈고 닦아 나가야 할 세 가지 덕목이란 무엇인가?
첫 번째 : 분석적 사고능력(Art of Analytical Judgment)이다.
“이것이 모자란 디자이너들, 공기총 사수형이다.”
흔히 모든 것을 뭉뚱그려 소위, '느낌'이라는 것으로 이야기하는 많은 디자이너들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사물과 사안에 대한 분석적 사고와 판단능력은 문제해결과 새로운 대안 제시의 가장 기초적이고도 핵심적인 능력이다. 디자이너로서 갈고닦아야 할 감성의 에지(Edge)는 당연히 우리가 숨을 쉬듯 날마다 칼날을 예리하게 준비하고 있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며 굳이 디자이너가 아니라도 감성이 발달한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드물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문제는 잘 발달된 감성을 기반으로 분석적 판단에 이르는 전문 역량을 여하히 키워 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은 새로운 이슈 제기, 문제 해결, 그리고 클라이언트와 고객을 설득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요소이다. 우리의 크리에이티브 에지(Creative Edge) 또한 이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마치 공기총(산탄총)을 쏘듯 클라이언트가 좋아할 때까지 입맛을 찾아 헤매느라 프레젠테이션을 7번씩 10번씩 했다는 자랑 아닌 자랑을 습관적으로 하는 중견 디자이너가 될지도 모른다. 참고로, 이건 자랑이 아니다!)
두 번째 : 지적 판단능력(Art of Intellectual Judgment)이다.
“이것이 모자란 디자이너들, 고집만 세다 형에 속한다.”
디자이너도 디자이너이기 이전에 경제활동을 하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객관화된 시각으로 사고를 전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그 안의 수많은 정보들을 주로 미적(Aesthetic)인 관점에서 보고 마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심미성 이면에 있는 수많은 정보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지적판단 능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도록 '책 보기'와 '책 읽기'를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디자이너들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비즈니스의 파트너로서 기여도와 리더십을 높여 갈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만나고 상대하고 비즈니스 하는 대상의 대부분이 상식적인 일반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국제적 이슈들 또는 그 밖의 관심사들을 이야기할 때 제대로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지적 판단 능력이 필요하다. 우리의 전문분야를 일반적 관점에서 활용하고 이야기할 수 없다면 우리(디자인) 분야는 변호사나, 회계사 또는 경영 컨설턴트 등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는 리그에서 뛰고 있는 프로들이 되기에는 요원할 것이다. 숙달된 손목을 빌려주는 일에서 우리의 지적재산(Intellectual Property)을 제공하는 전문성을 위해서는 우리의 지적 판단 능력 배양을 위해 평소에 간단없이 노력해야 한다.
세 번째 : 개념화 능력(Art of Conceptual Judgment)이다.
“이것이 모자란 디자이너들, 잔 머리형에 속한다.”
개념화하는 능력은 국내 미술대학을 졸업한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선진 외국 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디자이너들 대비 상대적으로 가장 취약한 부분이 아닌가 싶다. (SADI의 경우는 좀 다를 것이라 예상하지만) 디자인을 단순한 심미적 관점에서만 조명하다 보면 '그냥 해봤어요.' 또는 '느낌이 좋아서' 등 단순한 주관적인 감성 표현에 그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이 경우 남들이 좋아할 때까지 수동적으로 기다리거나 클라이언트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안이 채택되도록 잔머리를 수없이 굴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으로서 개념화할 수 있는 능력과 판단력 없이 우리는 무엇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폼(FORM) 또는 쉐이프(SHAPE), 사이즈, 볼륨, 컬러, 타이포그래피, 이미지에 관한 것도 콘셉트와 더불어 표현할 수 없다면 의미와 설득력을 갖기 힘들다. 개념화하는 능력과 그것을 지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은 디자이너의 필수적인 요소 중에 하나로서 우리의 표현 기술이 설득력 있는 도구로서 활용되게 하는 원천이 되는 것이다.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기본적이고, 피지컬(Physical)한 기술들을 훈련하기 위한 지금까지의 많은 수고가 헛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새로운 시대에 디자인 분야의 리더를 꿈꾸고 있다면 준비해야 하는 전문 분야의 폭과 깊이가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는 점을 공유하고자 함이다.
우리의 주제가 분석적 판단(Analytical judgment), 지적 판단능력(Intellectual judgment), 개념적 판단능력 Conceptual judgment)에 있음에 여러분이 동의한다면 디자이너로서의 역할이 단순히 형태를 연구하고 컬러를 이야기하고 서체 크기에 목숨 거는(?) 즉, 마지막 과정에서 나타나는 결과물에 몰입한 나머지 우리의 주제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필자는 여러분에게 바란다.
소위 디자이너의 주제 파악을 초동 단계에서 소홀히 함으로써, 손목만을 대여하며 힘들고 고단하게 사는 것을 디자이너의 숙명으로 치부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후배 디자이너가 더 이상 양산되지 않기를 바라지 않는 필자의 충정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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