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급 UX 디자이너로 성장하기
포스트잇을 버려라
2014년부터 여러 프로젝트에서 코칭을 하다 보니 이제야 회사 사람들이 하는 일을 전체적으로 보게 된다. 나는 오랜 시간 PM(Project Manager)을 했고, 언제나 사람보다 일이 우선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일'을 챙기는 PM이 따로 있어서 나의 역할에도 변동이 생겼다. 나의 임무는 주로 프로젝트에서 맞닥뜨릴 '위기'를 예측하고 알려주는 것. 기존에 보지 못한 업무 프로세스를 관찰하며 흥미로운 깨달음을 발견했다. 오늘은 그 깨달음을 소개하려 한다. ㅣ이재용 PXD 대표이사
1. 도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라
처음 UX를 배울 당시에는 세세한 도구가 없었다. 크게 퍼소나, 컨텍스츄얼 인쿼리 같은 방법들이었는데, 그 방법들을 창시자에게 직접 배울 수 있는 때였다. 나는 그 행운을 얻었고, 누구보다 도구들이 ‘왜 만들어졌는지?’ 깊이 고민했다. 피엑스디를 설립하고 그때 배운 지식을 회사 동료들과 후배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똑같이 가르쳐도 잘 배우는 사람이 있고 못 배우는 사람이 생겼다. 또 잘 배우는 사람 중에 후배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그들을 관찰하면서 잘 배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지금의 피엑스디 팀장/그룹장들은 허허벌판에서 나무를 키우고 깎아 도구를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후배들이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표준 매뉴얼을 만들고, 각 부분 자료를 축적해 시각적인 도구를 만들어냈다. 필요한 포스트잇도 직접 만들고, 퍼소나를 만들 수 있는 보드와 스티커, 컨텍스추얼 인쿼리를 체계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 등 다양한 유·무형 도구를 만들어 이제는 누구라도 워크숍만 들으면 꽤 프로페셔널한 결과물을 낼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UX를 처음 배우는 초보 때는 이런 도구가 꽤 유용하다. 그러나 중급이 되면서는 이 도구들이 자신의 발전을 방해하기 시작한다.
*퍼소나
디자이너가 직접 관찰한 사용자의 행동에서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실제는 아니지만 구체적인 행동 유형과 사고방식을 가정해 디자인에 활용하는 사용자 유형.
2. 포스트잇 활용 도구에 의존하지 말라
여러 사용자의 목소리를 포스트잇에 적어 붙인 뒤, 다 같이 분류하면서 굵직한 항목들이 있는지 찾아내는 작업을 생각해 보자. 초보였을 때는 사용자로부터 나오는 다양한 목소리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난감한데, 포스트잇으로 분류하는 방법을 배우고 나면 빠르게 정리해서 꽤 그럴듯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방법은 (나중에 포스트잇이 없더라도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직관'을 훈련하는 것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목적을 잃어버린 채 기계적으로 포스트잇을 분류하는 경우가 늘어난다.
점점 포스트잇에 의존하면서 자신의 머리는 안 쓰게 되는 것이다. 내비게이션에 의존해 운전하다 보면 아무리 반복해도 길이 기억나지 않는 것과 같다. 포스트잇은 보조 도구일 뿐이다. 같은 크기와 색깔의 포스트잇에 적힌 아이디어들이 다 같은 무게를 갖는 것은 아니며, 유사한 내용이 많다고 더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 중요성과 디테일은 그것을 적은 사람의 머릿속에 있기 때문에, 포스트잇에 적으며 머리의 부담을 더는 순간 그 디테일은 사라져 버린다. 결국 남은 것은 기계적인 분류 뿐이다.
물론 적절한 포스트잇 활용은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중급으로 성장하고 싶다면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 포스트잇에 적지 말고 사용자 인터뷰 스크립트를 한 번 더 읽어 보기 바란다. 사용자가 한 말들을 모두 머릿속에 넣고 자신의 머리에서 분류하고 컴파일해 보자. 자세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머릿속에 넣고 잠을 자면, 다음 날 아침 혹은 시간이 지나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아이디어들이 있을 것이다. 또 포스트잇 없이 남들에게 설명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포스트잇은 절대 알려주지 않는 중요한 아이디어다. 오히려 포스트잇 도구를 만든 사람이 ‘왜?’ 포스트잇 활용 도구를 만들었는지 생각할 수 있어야 중급이 된다.
3. 인터뷰에서 ‘왜’를 상기하라
인터뷰도 마찬가지다. 초보일 때는 무엇을 질문해야 할지 막막하다. 중급이 되려면 (충분히 도구를 사용해 두려움이 없어졌다면) 인터뷰를 앞두고 차분히 앉아서, ‘나는 무엇이 궁금한가?’에 집중해야 한다. 그보다 먼저 ‘나는 무엇이 궁금한가?’에 관한 호기심이 있어야 한다. 그냥 사용자를 알아보자는 막연한 목표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그 포커스 하나를 가지고, 질문지 없이 인터뷰해 보라. 컨텍스트와 대화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진정한 ‘대화’를 통해 사용자가 말하고 싶은 것을 잡아내라. 이것이 진짜 인터뷰다.
‘왜’ 선배들이 줄기 질문과 가지 질문을 나누었는지를 온몸으로 깨닫지 못하면 중급이 될 수 없다. 인터뷰가 잘 되는 날은 줄기 질문에서 가지 질문으로 갔다가 다시 줄기 질문으로 돌아오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아, 내가 했더라도 도구를(요령을) 이렇게 만들어서 후배들에게 알려주었겠는데?’라는 가벼운 억울함이 들면, 그 때가 중급이다.
4. 퍼소나로 직관을 향상시켜라
왜 퍼소나를 만드는가? 자신의 관점을 만들기 위함이다. 사용자를 바라보는 자신만의 관점. 그냥 사용자 모습을 대충 스케치하는 것이 퍼소나가 아니다. 물론 처음에는 도구의 힘을 빌리지만, 몇 번 반복하다 보면 마음에 안정감이 생긴다. 그럴 때 도구를 버려 보자.
인터뷰하면서 머리를 텅 비운 채 받아 적지 말고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에 초점을 맞춰보자.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있구나’, ‘이 사람의 특징은 이것이구나’를 발견해야 한다. 인터뷰하면서 자기 머리로 ‘생각’해야 한다. 한 명, 두 명, 인터뷰를 늘려갈 때마다 머릿속에서 사람들을 분류해 보자. 이렇게 몇 번 하고 나면, 8명 기준으로 6명 정도 인터뷰했을 때 대략 머릿속에 퍼소나가 만들어진다. 나머지 2명은 확인 질문만 하면 된다. 그리고 나서 문서를 만들어라. 퍼소나는 ‘사람들의 행동과 태도에 대한 분류’라는 직관을 향상시키는 도구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기계적으로 분류한 쓸모없는 퍼소나가 되어버린다.
퍼소나의 특징 세 가지만 말해 보라. 그 세 가지는 정말 사용자 연구 없이 알 수 없는 것이었나? 또 프로젝트의 모든 중요 사항을 의사 결정할 수 있는 것인가? 누가 봐도 무릎을 탁 칠 만한 인사이트인가?
‘왜’ 퍼소나를 만드는가? 그냥 우리 회사 프로세스에 있으니까? 이렇게 기계적으로 만든 퍼소나는 고객 프리젠테이션 직후 바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쓸모가 없다.
5. 프로세스를 무시하라
마지막으로 프로세스를 무시해라. 전체 프로세스야말로 가장 큰 도구이자 큰 함정이다. 잘 확립된 프로세스일수록 머리를 비우고 노만 저으면 대략 목적지에 도달하는데, 그것이 초급에서 중급으로 성장하는데 있어 함정이 된다. 성장하려면, 계속 질문하라. ‘왜 이런 순서로 해야 하나? 목표는 무엇인가? 목표에 이르는 최선의 방법인가? 다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개선할 수 있거나 추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이렇게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질문하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진정으로 자기 프로세스가 만들어진다.
6. 우리의 성장 주체는 자신임을 잊지 말라
사람들 대부분은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질 때 성장한다. 어떤 구성원이 언젠가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왜 외주 프로젝트로는 성장할 수 없을까요?" 나는 "외주 프로젝트라고 생각하니까 성장 못 하는 것이다. 프로젝트에서 할 수 없다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전체 프로세스를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고, 완벽한 질문지를 미리 만들지 않으면 안 되더라도 ‘프로젝트에서 이렇게 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작은 실험과 작은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도전이 없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유의할 점은 누가 하라는 대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이 글의 핵심이다. 스스로 골똘히 생각해서 새로운 길을 찾아보라. 그것이 설령 기존 방법의 반복이더라도 거기서 자기만의 의미를 찾아보라. 회사의 한 동료가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 ‘아이디어가 생각나지 않을 땐 공원을 산책해 보세요’라는 도구를 알려주었다고 하자. 물론 공원 산책은 꽤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산책’이 아이디어를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결국 아이디어는 자기 머리로 만들어야 한다.
중급 단계는 누군가의 방법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방법, 혹은 같은 방법이라도 나만의 의미를 가지는 데서 출발한다. 그래야 비로소 ‘나는 디자이너다’ 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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