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 바탕에 한입 깨물어 먹은 애플 로그 하나. 그것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애플 디자인의 전부다. 극도의 미니멀리즘을 추구한 애플 디자인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동경할 만한 디자인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하여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너무나 자주 소품으로 나오고, 우리나라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자주 나온다. 그뿐인가? 애플의 컴퓨팅 환경이 IBM 체제가 지배하는 우리 환경에선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애플 컴퓨터를 사고 있다. 왜냐고? 대답은 간단하다. 디자인이 예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애플의 오늘날 디자인을 있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가? 당연하지만 현 CEO인 스티브 잡스는 아니다. 바로 하르트무트 에슬링거(이하 ‘에슬링거’)다. 아마 애플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라면 스티브 워즈니악의 이름은 들어봤을 것이다. 애플 컴퓨터를 탄생시킨 아버지. 그러나 스티브 잡스에 의해 밀려난 비운의 천재.
에슬링거는 워즈니악과 처지가 좀 다르다. 일단 에슬링거가 1982년 스티브 잡스를 만나 세운 전략을 살펴보자.
- 애플 컴퓨터는 작고 깨끗하고 흰색이어야 한다.
- 모든 그래픽과 서체는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어야 한다.
- 최종 형태는 빠르고 사용이 편리하며 첨단 기술이 장착되어 있어야 한다.
- 모든 제품 디자인은 환경친화적으로 도색을 하지 않으며, 저비용으로 제작해야 한다. 또한 ABS 플라스틱 사용을 기초로 하며, 다른 모든 소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자! 어떤가? 벌써 30년 가까이 된 예전에 세운 디자인 전략인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애플이 현재 전 세계적인 파장을 일으킨 디자인의 핵심 전략이 그에 의해 탄생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되었을 것이다.
에슬링거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인이다. 그는 히틀러 통치를 거쳐 패전을 겪었기 때문에 책에 나오진 않지만,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예술가에게 그렇듯 그런 환경은 오히려 그에게 자양분으로 작용했다.
당시 아무도 디자인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시기, 에슬링거는 전도유망한 슈투트가르트 공과대학을 관두고 슈바비시 그문트 디자인 대학에 진학한다. 그리고 1968년 그의 인생에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을 겪게 된다. 바로 킨즐러 시계가 후원하는 디자인 공모전에 출품한 것인데, 라디오를 들으면서 시계를 볼 수 있는 ‘시계 라디오’로 공모했다.
결과는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있던 심사위원들에 의해 혹독한 악평과 인격모욕에 가까운 대접을 받고 말았다. 에슬링거는 이때의 경험으로 인해 1969년 불과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프로그 디자인’을 설립하게 된다.
그는 배고픈 아티스트 대신 경제적으로 성공한 디자이너를 지향했고, 자신의 회사의 목표를 아래와 같이 정했다.
- 최고를 지향하는 기업을 찾아라.
- 고객(기업)을 위해 비즈니스 마인드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라.
- 이기적인 아티스트가 아닌, 선견지명을 가진 디자이너로서 유명해져라.
- 나의 유명세는 기업을 위한 주요한 자산으로 활용하라.
- 역대 최고의 글로벌 디자인 회사를 세워라!
- 항상 최고의 인재(직원, 협력업체, 고객)를 찾아라!
겨우 20대 중반의 청년이 내세운 너무 거창해 보이는 이 목표를 향해 에슬링거는 두려움 없이 도전했고, 오늘날 전설적인 결과를 이룩했다. 에슬링거가 디자인에 참여한 업체만 해도 에이서, 아디다스, 휴렛 패커드, 코닥, IBM, 소니, 야후, 야마하 등등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프로그>에서 에슬링거는 성공한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말하는 데 있어서 ‘창조성’을 가장 중요시 여긴다. <프로그>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단순히 ‘디자인’ 이야기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프로그>는 에슬링거가 여러 글로벌 기업의 디자인을 맡아 성공시킨 사례를 나열하며, 거기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다.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은 <프로그>를 통해 에슬링거는 디자인을 단순히 ‘제품 디자인’이 아니라, ‘세상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로서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다.
환경오염과 지구온난화로 위협받고 있는 지구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 모두가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매우 어려운 화두에 대해 나름대로 비전을 제시해 나간다.
그러면서 에슬링거는 21세기의 가장 큰 화두인 ‘창조성’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지 방법요인 등을 말하고 있다. 즉 <프로그>를 통해 개인은 개인대로 창조성과 목표수행을 위한 방법을 생각하게 되고, 기업가는 오늘날 무한경쟁과 디자인이 모든 걸 지배하는 세상에서 어떤 비전과 목표를 가져야 하는지 깨닫게 된다.
에슬링거의 <프로그>는 애플 디자인의 언어인 ‘스노화이트’ 뿐만 아니라, 그가 탄생시킨 수많은 디자인과 성공사례를 통해 우리에게 많은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아무래도 체계적인 글쓰기 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니다 보니 에슬링거의 글이 너무 장황하게 펼쳐진다는 점이다. 이런 류의 글들이 그렇지만, 작가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쫓아가며 쓰다 보니 독자가 이를 따라가기 어려운 아쉬움이 있다.
에슬링거의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을 따라 연대기순으로 적거나, 아님 애플-IBM-소니 등 기업별로 분류했으면 보다 재밌고 쉽게 읽히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든다. 비록 그런 약점이 있지만 <프로그>는 21세기 돌풍을 일으키는 애플의 산업전략과 성공한 기업과 개인이 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하고, 앞으로 보다 많은 이들이 행복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진지하고 질문하고 대답하고 있다.
<프로그>를 읽으면서 당신은 담대한 마음으로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을 창조할 한 알의 밀알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싹 틔울지는 전적으로 당신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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