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깊은 계단
저 강석경 · 창작과비평사(창비) · 1999.10.31 · 한국소설
2025.03.24 ~ 03.28 · 8시간 27분
이 소설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되었다. 3월 중순 주말로 기억되는데, 아버지 댁에 갔을 때 결혼 전까지 내가 쓰던 방에 책상이 하나가 지금도 그대로 있다. 지금은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책상 옆으로 책장이 하나가 있는데, 책장 깊숙이 다른 책에 가려져 있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내 안의 깊은 계단’이라는 제목을 보고 이 책이 무슨 책인지 알 수 없었다. 작가는 아주 생소한 ‘강석경’이라는 작가명을 찾았고, 아버지가 보시던 책으로 여겼다. 아버지께 여쭤보니 모른다는 답변만 들려왔다. 내가 이 책을 보관할 이유는 없을 듯 하지만, 호기심이 생겼다. 어떤 책인지 궁금하여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고 책에 대한 정보가 생각보다 많이 노출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책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출간일를 보니 꽤나 오래된 소설이었고, 상태는 아주 말끔하니 한 번도 열어 본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책상에 앉아서 잠깐 읽게 되었고, 집으로 돌아와서 처음부터 다시 읽게 되었다.
‘내 안의 깊은 계단’, 이 소설은 생각만큼 간단한 책은 아닌 듯한 인상을 받았다. 책의 내용이 쉽게 읽히지 않았고, 조금은 정적인 듯해서 느낌이 쉽게 와 닿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맞을 듯싶다. 일단, 90년대 말에 출간된 책이기에 현재의 출간되는 책들과는 많은 거리감을 느낄 수 있을 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재 쓰이는 단어들도 과거에서 사용한 단어들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특히, 소설 속에 등장하는 외국 지명들이 많이 있는데, 지금과는 다른 과거에 사용했던 방식이라서 혓바닥을 한두 번 정도 굴려야 이해됐던 부분들이 많이 있었다. 또한, 이 소설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작가의 상당한 지식으로 인한 부분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특히, 고고학과 관련한 전문 지식들과 그리고 음악과 연극이라는 분야의 지식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소설을 쓰면서 학습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지식들에 대한 내용들이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때문에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도 다큐멘터리 책을 읽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전문적인 지식들 속에서 등장인물 간의 인과관계는 철저하게 선을 긋고 진행되는 스토리 전체만 놓고 보면 상당히 깊이 있는 내용으로 전개되어 있다고 볼 수 있고, 인물들의 내면의 깊은 사색을 들여다볼 수 있는 내용에 집중하고 있다.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문장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서정적이면서 섬세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많이 있는데, 한 번만 읽고 지나 간 부분이 없을 정도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꽤 많이 있었다. 또한 소설 속에서는 고고학이라는 관계성에서도 단순하게 직업의식으로 치부하기보다는 고고학을 통해 과거 속의 죽음을 알아가는 이야기들에서 자연스럽게 과거의 죽음과 현재를 살아가는 삶에 대한 고찰을 느낄 수 있는 묘한 분위기도 느낄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나칠 수 있는 부분들도 이 소설에서는 곱씹으며 더 많은 의미를 깨닫게 되어 한 문장 한 문장이 주는 여운을 음미하면서 읽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등장인물들 간의 인과관계를 들여다 보면 이 소설의 묘미를 알 수 있을 듯하다. 첩의 아들인 ‘강희’와 그의 여동생 ‘소정’, 그리고 그들의 사촌인 ‘강주’와 그의 약혼자인 ‘이진’, 이 네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강희는 독일 유학파로 한국으로 돌아와 연극을 연출하며 성공을 거두며, 한 여자에게 얽매이기보다는 자유로운 연애를 추구하며 욕망에 충실한 남자로 등장한다. 소정은 도서관의 사서로 일하며, 자신이 첩의 딸이라는 굴레를 벗고자 애쓰지만 자꾸 엇나가게 된다. 결국 중국 여행에서 만난 일본 청년과의 진실하고 솔직한 사랑을 경험하게 되고, 이혼을 한 후 호주로 이민 계획을 세운다. 강주는 고고학자로 평범한 남자로 등장하지만, 이진과의 결혼을 앞두고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이진은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오랜 기간 동안 강주와 연애를 하지만, 결혼을 앞둔 상황에서 세상을 떠난 강주의 아이를 임신한 채로 강희와 결혼을 하게 되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못한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이렇게 네 명의 등장인물들은 서로 상반된 배경에서 자신의 위치와 사랑에 대해 얘기하고 있지만, 모두 엇갈린 갈림길에 놓여 죽음과 삶이라는 심오한 주제를 밀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
스토리의 배경은 경주가 대부분으로 강주의 고고학자라는 직업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경주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고고학이라는 관계가 주는 의미는 남다른 배경이 된다. 수많은 고분이 존재하는 곳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고고학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죽음과 삶이라는 순환적인 시간관계를 이어주고 현재를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모습을 소설 내용 전반에 깔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강주는 고분을 발굴하고 유물을 통해 삶의 흔적을 탐구하고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이해해 가며, 죽음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는 매개체로써는 고고학만큼 진지한 주제 의식을 내포하는 것은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소설의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그런 이유들이 하나씩 밝혀지게 된다. 또한, 경주는 고분이 많은 것도 의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고분은 죽은 자들의 영원한 안식처이지만, 동시에 고분 주변의 풍경으로 인해 새롭게 태어나는 공간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법하다. 경주라는 공간과 고고학적 상상력이 더해져 소설의 깊이와 상징성을 부여하며 현재와 과거가 연결되어 끊임없이 순환하는 흐름에 대한 연계성을 보여주고, 죽음이 그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지는 순환의 일부임을 소설 속에서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내 안의 깊은 계단’은 90년대 당시의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도 이 소설이 주는 의미가 남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급변하는 한국 사회에서 풍요로운 시대를 맞이 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찾기보다는 오로지 물질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갈등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이유를 등장인물들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강희는 자유분방한 연애관으로 인해 한 사람에게 머물지 못하고 울타리 밖으로만 떠도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이진은 경제적인 안정을 위해 아이들을 가르치지만 사랑 앞에서는 망설이는 모습도 그런 사회적 환경이 만들어 준 개인주의적 발상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또한, 가족과의 관계와 연인과의 관계 그리고 사회 속에서 고립되어 가는 모습에서 깊은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소정은 첩의 딸이라는 사실이 사회적 낙인으로 찍혀 이혼을 결심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그리고 이진은 강주가 죽고 난 후 강희와 결혼을 하지만, 강희와의 원만하지 못한 결혼 생활이 이어지는 대목이 그런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사회 분위기 탓에 인간관계는 단절되고, 고립되어 가는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은 씁쓸함 마저 들게 한다.
‘내 안의 깊은 계단’은 어째 보면 단순한 연애 소설로 보여질 수 있을 법하다. 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삶은 결코 녹록지 않다는 의미를 소설 속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삶이 주는 의미와 그 속에 담긴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모습 또한 소설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강석경 작가는 욕망과 사랑, 삶과 죽음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느낌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단어이기도 하지만, 보편적인 시각적 의미로서의 주제 의식에 질문을 던지며 작가 사유적 탐구를 이 소설을 통해서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한 권의 소설을 통해서 강석경 작가에 대해서 아주 조금 이해하지 않았나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소설에 흐르는 문체는 섬세하다고 말하고 싶다. 한 문장 한 문장의 의미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단순한 의미가 아닌 깊이감을 느낄 수 있는 문장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깊이 있는 심리적 내면의 의미들을 되새김질하며 느낄 수 있는 공감감은 강석경 작가 특유의 필력이 아닌가 생각한다. 강석경 작가의 소설 한 권이 끝이 아닌 더 다양한 책들을 마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 깊이 있는 책들을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인상적인 한 문장
할머니를 닮았다는 말을 들으니 강주는 어쩐지 즐거웠다. 어머니의 법치주의보다 할머니의 자유주의가 더 인간적이 아닌가. 할머니는 일찌감치 열녀로 박제되기를 거부하고 온몸으로 삶의 파도에 뛰어든 인상파였다. 그는 노장이어서 시앗을 본 며느리를 애처로워하면서도 소실의 자식인 소정도 감싸주었다. 이것도 인생이요. 저것도 쓰라리고 고된 인생이었다.
형은 강 같아. 저 혼자 깊어가는 강. 그 강에 뛰어들어 자맥질하면서 은어도 건져 올리고 숭어도 건져 올리지만 바닥을 볼 수는 없어. 형이 따뜻한 사람인 건 틀림없지만 다가가면 어느새 물러서는 산그림자 같아. 형은 내가 옆에 있어도 혼자 있는 사람 같아.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풀 수 없는 고리로 연결된 가족이라는 인연. 그 누구도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 인연이 행운인 사람도 있고 불운한 사람도 있다. 그것이 불운으로 보였던 소정에게 가족이란 고르디우스의 매듭과 같았다. 매듭을 풀지 못하면 죽어야 하지만 알렉산더 대왕은 칼로 매듭을 치고 통과했다. 소정도 늘 제 목을 죄어오는 가족이란 매듭을 한 칼로 치고 새로운 삶을 향해 떠나고 싶었다.
고통은 동물의 특권이라지만 아픔에 반응하지 않는 수동적인 식물의 삶이 불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열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뿌리는 어둠 속으로 내려 물을 길어 나르고 줄기는 태양을 향유하면서 훌라호프 같은 나이테를 365일에 한번씩 두르며 인간 세상을 굽어 보는 나무들, 인간에게 그늘과 열매를 내어주고 아낌없이 제 생명의 몫을 하면서 세기를 넘나들며 군자처럼 자리를 지키는 나무들이야 말로 이 지구의 주인이 아닐까.
‘인간은 자연 속에서 낭만과 시를 찾으려 하지만 자연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제적이야. 숲에 가면 수십 수백 종류의 식물들이 교향곡처럼 화음을 이루고 있지. 정적 속에서 겸손하게 신이 주신 생명을 지키고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은 복잡한 먹이연쇄를 통해 기계처럼 상호작용을 할 뿐이야.’
‘이진은 삶의 들판에서 느닷없이 철퇴를 맞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잃어버리다니. 다시는 눈을 마주칠 수 도 살을 맞댈 수도 없고 낭랑한 목소리로 부르는 ‘겨울 나그 네’도 들을 수 없고 함께 차도 마시지 못하고 미래를 얘기할 수도 없다. 미래가 없다는 것, 그건 바로 어둠이었고 절망이었다.’
‘살아남은 자는 영원한 이별에 상처받지만 죽은 자는 유배 뒤의 귀가처럼 평안한 잠을 잘 것이다. 강주도 물론 죽음을 원치 않았지만 그것이 숙명이 되었으니 어쩌랴. 이승의 안타까운 것들은 지상의 신께 맡기고 민들레씨처럼 저승 구경 다니다가 그리움이 손짓하면 내세에 다시 꽃피소서.’
‘행복의 땅에서 쫓겨나는 이브는 비통하나, 인습의 땅에서 걸어나가는 서른 아홉살의 여자는 지쳐 보이지만 희망을 안고 있다. 조선시대의 한 여류시인이 대국이 아닌 작은 나라 조선에 태어났음을 한하고, 그중에서도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한하고 갔다더니 평범한 현대 여자의 한도 오백년 전 여자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본질과는 아무 상관 없이 제도의 문제로 고통받았고 결혼을 하면서 가정의 울타리 속에 안주하려 했지만 그 속에도 사랑이 없었다. 소정이 안주하고 싶었던 것은 제도가 아니라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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